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프레드 대왕 (문단 편집) == 평가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tatue_d'Alfred_le_Grand_%C3%A0_Winchester.jpg|width=100%]] || || 알프레드 대왕 사후 1,000년 기념 행사 때 세워진 동상. || 이처럼 알프레드는 '''[[대왕]]'''이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업적을 남겼다. 다만 [[중세]] 유럽의 대왕 시리즈 가운데 생전부터 인정을 받았던 [[카롤루스 대제]]나 [[오토 1세]]와 달리 알프레드는 죽은 지 수백 년이 지나서야 위대한 왕으로 인정받았다. 그 이유는 잉글랜드가 결과적으로 [[정복왕 윌리엄]]을 비롯한 노르만-프랑스계 엘리트의 지배를 받게 되고, 이들의 후예들이 잉글랜드의 지배층이 되면서 피지배층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왕을 딱히 높이 평가할 이유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세 잉글랜드에서 토착 앵글로색슨인과 노르만인 간 갈등은 소설 《[[아이반호]]》에 자세히 묘사되었다.]. 그러나 1214년 부빈 전투로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한발씩 걸쳤던 노르만계 귀족들이 완전히 프랑스에서 발판을 잃어버렸고 잉글랜드인에 동화되었으며 이때부터 잉글랜드의 독자성이 부각됨에 따라서 그 독자성을 만들었던 알프레드 왕은 점점 높이 평가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 및 [[헨리 8세]]의 이혼 문제로 [[성공회|영국 국교회]]가 로마 교황청과 분리되어 모든 전례용어가 라틴어에서 영어로 바뀌었다. 그러자 이미 수백 년 전에 라틴어를 고대 영어로 번역했던 알프레드 왕의 업적이 부각되면서 단순히 일개 임금이었던 그는 영국 역사상 한 명밖에 없는 대왕으로 격상되었다. 다만 이러한 인식 변화는 [[튜더 왕조]]의 정치적 목적이 강했기 때문에, 로마까지 몸소 순례를 갔던 알프레드의 독실한 가톨릭 신앙은 다소 덜 강조하는 등 튜더 시대의 입맛에 맞는 재해석이었다. 이 부분은 영국 사학계에서 영국의 가톨릭 시대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는 20세기 후반 이후에 와서야 제대로 재조명을 받았다.[* Horspool 2014] 즉, 바이킹계 프랑스인이라고 할 수 있는 [[노르만족]]들의 후예들이 잉글랜드를 지배할 시절에는 알프레드 대왕을 두고 덴마크인(바이킹)들과 싸워 이긴 용맹한 원주민(앵글로색슨) 왕 외에 다른 평가가 없었다. 이들이 13세기초에 프랑스에 있었던 기반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잉글랜드인이란 정체성이 확고히 생기자, 독자적인 '잉글랜드'가 부각되면서 비로소 '잉글랜드'라는 개념의 원조였던 알프레드 대왕이 부각되었다. 알프레드 대왕은 자식복과 후손복도 좋은 편이었고, 왕위 계승도 비교적 무난했다. 그의 사후 즉위한 아들 [[대 에드워드]]는 아버지의 군재를 물려받아서 바이킹의 침략과 각지의 반란을 일소했고, 손자인 [[애설스탠]]은 할아버지 못지않은 먼치킨급 재능의 소유자로 그의 치세 때 잉글랜드는 사실상 통일왕국이 되었다. 이어진 후왕(後王)들도 11세기 덴마크 왕조의 침략이 본격화될 때까지 통치능력은 대체로 무난함 이상이었다.[* 재위기간이 짧은 사람은 더러 있었지만, 암군(暗君)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선왕이 죽자마자 박터지게 싸워대고 결국 왕국을 세 갈래로 나눈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들과 여러 모로 비교되는 부분이다. 물론 대륙같은 경우는 영국과는 달리 원래 이런 내전이 종특 수준이긴 했지만... 또한 비록 정식적인 앵글로색슨계 웨식스 왕조는 끝이 나면서 노르만 왕조가 열리긴 했지만 노르만 왕조의 후손이자 동시에 알프레드 대왕의 후손인 [[마틸다(잉글랜드)|마틸다]][* 알프레드 대왕의 후손인 웨식스의 마가렛이 스코틀랜드의 [[말콤 3세]]와 혼인하여 스코틀랜드의 마틸다를 낳았고, 이 마틸다가 노르만 왕조의 마지막 왕 [[헨리 1세]]와 혼인해 [[마틸다(잉글랜드)|마틸다]]를 낳았다. 즉 모계로 여러 다리 건너 이어진 것이다.]가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 플랜태저넷과 혼인하여 헨리 2세를 낳아 [[플랜태저넷 왕조]]를 창시하였으며, [[헨리 2세]]와 [[리처드 1세]], [[존 왕]]은 물론 아직까지도 영국 왕가에는 알프레드 대왕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한편 알프레드가 뒤늦게 재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동시대에 그의 부하가 쓴 전기가 유실되지 않고 전해졌기 때문이다. 알프레드 휘하 [[웨일즈]]인 주교였던 애서(Asser)는 라틴어로 《앵글로색슨의 왕 알프레드의 생애》(Vita Ælfredi regis Angul Saxonum)라는 미완성작 전기를 남겼다. 이 전기의 원본은 중세에 잊혀졌다가 재발견되어[* 원본은 18세기 화재로 소실] 알프레드의 구체적인 행적을 후대인이 알 수 있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